안녕하세요. 아트 스페이스 풀(이하 ‘풀’)의 안소현입니다. 저는 전임 이성희 디렉터의 뒤를 이어, 2017년 11월 12일 총회에서 추천과 동의 절차를 거쳐 2018년 1월 13일 디렉터로 취임하였습니다.

최근까지도 저는 20주년을 앞둔 미술 공간이 지속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의의를 두는 다소 낭만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하면서 이 공간의 역할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풀’은 여지없이 제도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안공간들은 공공기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그들이 설립 초기에 표방한 젊은 작가의 지원 기능은 이제는 국공립 기관을 비롯한 많은 공간의 일반적인 역할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풀’은 막연히 제도 바깥, 대안적 형식을 외치기보다는, 제도 내에서 여전히 대안적 실천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예술계는 이념과 그 실현을 위한 실천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가장 낡은 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이념을 빌미로 은폐해왔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기에 이념적 차이로 인한 충돌보다 더 크고 복잡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성폭력과 노동 문제를 포함한 인권의 문제로, ‘풀’도 그에 대한 비판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저 역시 제 안의 편견과 무지를 날마다 깨닫는 중입니다. 따라서 예술에서 몫 없는 자들을 찾고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 ‘풀’이 우선 고민할 대안적 실천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몫 없는 예술을 위한 실천은 윤리적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술의 유속은 나날이 빨라져서 작고 느린 곡류를 모조리 깎아내고, 비평 언어들은 주류를 따라잡는 데 급급합니다. 그 가운데 쉽게 소비되어서는 안되는 예술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 성급한 뭉뚱그림에 저항하는 예술들을 위한 비평적 몫을 마련하는 일이 ‘풀’의 대안적 예술 실천의 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풀’은 앞으로 다음과 같은 활동들에 주력하려 합니다. 첫째, 2017년 시작한 반성폭력 세미나를 이어나감으로써, 예술계의 질긴 악습을 끊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나아가 예술이 그 추동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둘째, ‘풀’에 어떤 작가들이 있는지보다는 ‘풀’이 작가들과 함께 어떤 수행을 할 지 고민하겠습니다. 그것은 ‘풀’이 ‘이름’이 아니라 ‘수행’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김미정, 신지이 큐레이터와 함께 비평적 큐레이터쉽을 강화함으로써 그 새로운 수행의 방식들을 찾아나가겠습니다. 셋째, 2019년 개관 20주년을 맞는 ‘풀’은 아카이브 연구를 통해 근과거를 재조명하되, 풀이 쌓은 역사가 아니라 ‘풀’이 낸 균열을 중심으로 아카이빙 하려 합니다. 그것은 주목받은 작가들의 정연하고 명확한 연대기가 아니라 주목해야 했으나 놓칠뻔한 움직임들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풀에는 많은 후원자가 있습니다. 그동안 ‘풀’에서 느낀 것은 그 후원들이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미술제도 안에서 ‘풀’이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준 가장 핵심적인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풀’의 후원자들이 새로운 형태의 예술 소비의 주체, 나아가 담론 생산의 투자자, 시장경제에 균열로 발언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풀은 노력해나가겠습니다. 언제나 지금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안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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