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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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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페이스
 
2017 풀 프로덕션 《무용수들
 

○ 전시명: 무용수들

○ 작가: 할릴 알틴데레, 이고르 그루비치, 요아킴 코에스터, 줄리안 뢰더, 서평주, 안정주, 옥인 콜렉티브

○ 기획: 조선령

○ 그래픽 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 디자인: 신익균, 김형준

○ 기간: 2017년 7월 13일(목) ~ 8월 13일(일)

오프닝 리셉션: 2017년 7월 13일(목) 오후 6시 

○ 강연: 김지혜 (미학연구자) "아감벤의 잠재성과 몸짓"

             2017년 7월 16일(일) 오후 3시

○ 강연신청:  https://goo.gl/forms/z3EMnT4gCt9uUWUw2 (신청마감)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전시의 오프닝 행사는 몰타맥주Cisk와 함께 합니다.

 

 

운동의 환영, 망설임, 변용 : 영상매체와 신체 제스처
 
조선령(전시 기획자) 
 
《무용수들》은 사진과 영상 같은 광학적 매체가 인간의 신체 제스처를 가시화할 때 어떠한 미학적, 정치적 함의가 발생하는가, 특히 '예술 외부의 장’에서 이미 코드화되었던 신체 제스처가 이 과정에서 어떻게 변용되는가를 탐구하는 프로젝트이다. '예술의 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제스처란 정치적(시위, 선거, 폭동 등), 병리적(히스테리, 감염), 사회적(난민의 탈출, 체조 등) 영역 등 다양한 장에서 때로는 상투적이거나 관성적으로, 때로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움직임들을 말한다. 《무용수들》의 참여 작가들은 이러한 제스처들에서 그 원래의 목적을 괄호침으로써(아감벤적 의미에서) ‘장치를 헛돌게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의미를 이 작가들이 사용하는 매체 자체의 형식적 특성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용수들》의 작가들이 신체 제스처를 변용함으로써 지향하는 것은, 사회적 코드를 벗겨낸 '벌거벗은’ 어떤 몸이 아니라, 또 다른 장치, 즉 사진과 그 논리적 후예인 영상매체에 의해 포획된 신체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사후에 덧붙여진 해석이라기보다는 영상 매체가 신체 제스처를 포착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이중화 작용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이중화 작용은 단지 우연이라기보다는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매체가 신체 움직임을 포착할 때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사진과 같은 매체는 물론이고 영상 역시 움직임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기술적 수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이의 지각을 '속이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역으로 말하면, 어떤 이미지를 움직인다고 느끼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능력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인간 시신경의 생리적 한계를 넘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단 한 장면만 제외하고) 정지된 사진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영화<환송대> 같은 영화도 운동의 환영을 발생시킨다.
 
영상매체가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불가피하게 분절화가 발생한다. 즉 영상 매체 속에서 움직임의 창출은 이미 절단되고 분절된 단편들의 재조합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이중적 작업은 기술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지각과 경험을 재조직화하며 담론의 차원이 개입할 여지를 남긴다. 영상매체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에드워드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와 에띠엔-쥘 마레이(Etienne-Jules Marey)의 크로노포토그래피에서 샬페트리에르 정신병원에서 행해진 히스테리 환자 촬영, 초기 흑백 영화에서의 제스처 표현(예를 들어 장 비고(Jean Vigo)의<품행제로>와 같은 영화)는 그 ‘사실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기이한 어색함을 드러낸다. 이 어색함은 한편으로는 그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느낌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재현의 장에서 포착 불가능한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속박과 자유의 양면을 오가는 진자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은 손쉬운 정치적 판단에 균열을 일으킨다. 상투성과 창조성, 숙련성과 즉흥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애초에 사진과 그 논리적 역사적 후예인 영상매체는 육안으로 포착하기 힘들었거나 저장할 수 없었던 운동을 저장하는 매체로 시작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머이브릿지가 캘리포니아의 농장에 12대의 카메라를 설치해서 벌였던 실험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말이 달릴 때 다리의 움직임이 어떤가에 대한 오랜 논쟁을 이 놀라운 기계는 종결시켰다. 머이브릿지의 다음 발명품이 스트로보스코프를 이용한 동영상이었다는 사실은 논리적이다. 그 후로 사진과 영상은 움직임이라는 불가해한 현상을 기록하는 혹은 처음으로 ‘가시화’하기 위한 매체로 발전했다. 벤야민은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이론화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가시적인 것의 이차적인 모방이 아니라, 그때까지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가시화의 매체’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움직임을 최초로 가시화한 매체로서의 광학적 매체는 사실은 운동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영상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한 번도 움직임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축구장이나 야구장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장면을 비디오를 통해 재생할 때, 비디오 화면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 움직임을 인식한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직접 본 것이 너무 빨라서 잠재적인 차원을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는 인간의 움직임이 아닌 것들의 속도를 접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상매체는 운동을 감속시키고 비로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두 번째는, 주관적 경험을 넘어선 지각의 객관적 토대의 측면에서 그렇다. 비디오 판독은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다같이 확실하게’ 본 것으로 만들어주며, 이를 통해 비로소 운동의 객관성을 승인한다.
 
하지만 ‘영상’은 있는 그대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라 이미 분절시킨 사진들의 결합체로서 등장하게 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기이한 면을 낳는다. 인간이 소리의 속도를 돌파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빛의 속도는 여전히 거대한 장벽으로 남아있으며, 이에 따라 움직임을 ‘가시화’하는 것은 여전히 어떤 근본적인 절단과 분절의 도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상 속의 움직임은 이미 절단시킨 단편들의 재조합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영상매체는 운동을 가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환영을 창출한다. 이러한 환영적 성격에서 근본적으로 영상 매체가 지닌 모호함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영상을 통해 움직임을 본다는 것은 어떤 유령, 환영, 도플갱어가 지닌 기이함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대립구도는 현실과 매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 내부에서 발생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이 ‘사이’에서 제스처들의 변용이 일어난다. 《무용수들》이 ‘예술 외부의 장’에 있는 제스처들을 소재로 삼은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의 이중의 운동이 발생한다. 하나는 매체 자체에서 일어나는 운동. 두 번째는 두 장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운동. 그러나 두 가지 운동은 결국 겹치고 수렴된다. ‘예술로서의’ 영상작품이 행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삶의 움직임을 담는 것’이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예술 외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술적으로 작동하는’ 영상매체는 불가피하게 외부를 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일종의 변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변용’의 공간은 단지 비판이나 전복이나 거부에 할당된 공간이 아니다. 변용 혹은 재전유는 하나의 층에서 다른 층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오히려 애매한 스펙트럼 속에서 망설임, 균열, 이중화, 저지 등 다양한 작용들이 일어난다. 수많은 층위들이 겹치고 나누어지고 또 결합되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유동적인 층위들이 발생한다. 《무용수들》은 이 지점들, 이 층위와 간격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것은 미학적일 뿐 아니라,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탐구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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