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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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풀 프로덕션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 전시명: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 작가: 김지평, 남궁호석, 신익균, 엄지은, 정서영, 주황
○ 기획: 안소현
○ 기획보조: 김선옥, 신지이, 한상은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프로그램 개발: 홍진훤
○ 공간디자인: 신익균
○ 공간디자인 보조: 안부, 정덕현, 조재홍
○ 관람기간: 2019년 8월 1일(목) ~ 9월 1일(일)
○ 오프닝: 2019년 8월 1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20년, 특별할 만한 시간이다. 십진법이 선사한 소소한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별한 시간을 기리는 익숙한 방법들이 있다. 기억을 되살리고, 의미를 되새기고, 사람들을 모으고, 널리 알리고,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참에 그런 등거리적 특별함 말고 변곡의 특이점을 만들 수는 없을까. 늘 끌어안고 살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알게 된 집안 비밀처럼, 시끄럽지만 치르면 그만인 기념 말고 조용하지만 두고두고 뒤흔들 기억을.   

미술에서는 기억을 모아놓은 것을 흔히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참 헐거운 유행어였다. 무엇을, 어떻게 구조화해서,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보는 이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거나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카이브 병(mal d’archive)’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이 기억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리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카이브를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기관의 긴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누군가의 철저한 수집벽을 드러내기 위해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이런 파괴의 뉘앙스 소실은 어느 정도는 프랑스어 mal(병/악)을 영어의 fever(열병/열풍)으로,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난 의미의 쏠림 때문인 것 같다)   

죽음 충동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카이브는 늘 다시 읽고 새로 쓰기를 요구한다.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저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재구성을 전제로 하며, 언제나 동일성을 포기하면서 새로이 구축된다. 아카이브는 그렇게 ‘아나카이브(anarchive)’가 된다. 병력(anamnesis)을 살피듯 과거를 꼼꼼히 다시 읽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병을 치료하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간에. 풀에도 아카이브를 재가공하는 프로젝트가 여럿 있었다. 인쇄물, 사운드, 만화, 미술비평, 사회적 미술 등 때로는 매체로, 때로는 주제로 아카이브를 재구성해왔다. 

2019년의 풀은 어떤 ‘아나카이브’를 구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20년을 신화화하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피게 하는 병력을 기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동일성을 무너뜨려 공간이 사라질 각오를 할 만큼 미래를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먼저 너무 요란하지 않은 가볍고 자연스러운 아카이빙의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요즘 자료를 모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역시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좀 더 정교한 발췌를 원할 때는 확대 하거나 크롭 하고, 그 이미지/텍스트에 또 다른 글을 붙여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는 점점 더 흐려졌다. 전시 리플렛에 실린 글부터 인터뷰, 책, 작품, 사진, 메모, 영상 등이 아무런 위계도, 계통도 없이 모여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의 20년을 크롭 하다보니 점점 도드라진 곳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을 분류하는 유일한 기준은 ‘생각’ 뿐이었다. 그 생각을 드러내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물을 때마다 매끈한 답을 얻지 못했다. 누군가는 종이 위의 선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밑그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습작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생각의 메모라고 했다. 결국 형식도 매체도 정해져 있지 않지만, 목적지에 대한 강박이 없는 모든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냥  만들어가다 보면 어떤 꼴이 나오고, 그 꼴이 마음에 들면 이름을 붙여 불러주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쪽에 남겨두는 그런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런 애매함이 꼭 풀 같았다. 20년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풀을 그려왔다. 그것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드로잉 룸’은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드러난 일반적 공간에서 감춰진 특화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응접실 같은 곳을 가리켰다고 한다. 풀의 20년을 다시 읽으면서 특화하고 싶은 몇 개의 이야기들을 아카이브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풀이 앞으로 더 깊숙이, 신중하게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주제를 제시해보려 했다. 여섯 작가가 그 주제들을 통일성 없는 연쇄성으로 이야기한다.     

누군가 정서영은 풀에 잘 안 어울린다고 하면 주저 없이 수긍하겠지만, 풀의 미래를 고민할 때는 항상 정서영이 떠올랐다. 정치적 내용을 어떤 미적 형식에 담을 것이냐는 당의정 같은 질문 말고, 어떻게 미술이 관성, 트렌드, 권위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냐는 소금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서영이 풀의 개관전 초청 작가였다는 것은 의외지만 마땅했다. <쇼케이스 쇼케이스>(2015)는 전시의 프레임이 만든 관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역시 물살의 세기는 떠내려갈 때는 잘 모르고, 거스를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 

풀의 크고 작은 전시와 일에 참여해온 김지평도 너무 익숙해서 간과했던 전시의 프레임을 비로소 보고 읽게 만들어서 보는 것을 교란한다. 우리의 굳은 머릿속 전시는 식민지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어서인지, 전통적인 ‘보여주기' 장치들은 좀처럼 섬세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김지평은 프레임 속 이미지를 단순화하거나 비워버림으로써 족자나 병풍 자체를 주인공으로 모신다(<모심>). 작가는 족자의 각 부분을 여성의 옷 명칭으로 부른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랫부분은 치마, 윗부분은 저고리, 양 쪽에 달린 띠는 소매라고 불린다. 그리고 각 족자에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붙여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레베카는 망령으로 떠도는 다중인격의 미녀이고, 검은 벨벳을 두른 카르밀라는 뱀파이어 소녀이며, 금발과 진홍색 드레스의 오들리는 이중혼을 감행하는 선정소설의 주인공이다. 세 족자는 규범을 우습게 아는 매혹적인 여자들의 초상화이다. 민족주의적 전통은 문을 닫아걸지만, 여성주의적 전통은 못 보던 세계를 향해 문을 연다.  

2009년 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주황도 줄곧 여성들의 초상을 찍어왔다. 영상 <민요, 저곳에서 이곳에서>(2018-)에서는 프레임 안에 꽉 찬 여성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약간 다른 발음, 생경한 가사, 그러나 어딘지 익숙한 멜로디의 민요를 부른다. 민요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사도, 리듬도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민요가 때로는 사랑 노래로, 때로는 혁명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에 사는 소위 ‘동포’들이 부르는 민요는 이주의 역사, 이데올로기, 정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요약 불가능한 정서들을 함축한 일종의 시적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스펙터클한 화면, 드라마틱한 사연,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더할 나위 없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증언이 된다. 

풀랩(풀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엄지은의 <줍는 배: 고리 밖에서>(2019)도 작가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믿으라고 외치지 않는데 ‘아’ 하며 빠져 들어가는 이상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상은 육지가 바다에 잠겨버린 미래에, 역사의 흔적을 ‘줍는 배'가 길어 올린 것들이 마구 다가와 부딪히는 것을 기록한 처음 보는 종류의 항해일지이다. 배가 주워올린 흔적들 사이에는 인과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그야말로 초시간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사건들 사이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유사성을 읽어내는 엄지은의 시선을 밑도 끝도 없이 따라가게 된다. 더듬어보면 사실 다큐멘터리는 이미 그래왔다. 그 시제가 과거라는 이유로,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말과 이미지들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엄지은은 인과성도, 시간적 순서도, 상식적인 것도 없애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엮어낼 수밖에 없으며, 낯선 유사성은 현실을 더 날카롭게 노려보게 해준다. 

시간을 자유롭게 부리면서 예측 못 할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은 남궁호석이 즐겨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2000년과 2004년 풀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2006년 <미래일보>를 발행한 이후, 2007년부터 문신을 둘러싼 위반과 제도화의 흥미진진한 줄다리기에 매료되어 현재 타투이스트이자 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남성적이고 과격한 이미지로 굳어진 문신을 새기는 동작이 전통적 여성의 이미지로 고착된 수를 놓는 동작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천에 사진을 프린트하고 그 위에 수를 놓았다. 1980년대 남성들이 열광했던 권투 선수들의 근육질 몸에 참하고 섬세하게 자수를 놓음으로써, 작가는 젠더적, 사회적 선입견들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궁호석은 타투이스트로서의 일과 작가로서의 작업이 자신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신익균의 설치작업과 전시공간 디자인을 관통하는 생각과도 이어진다. 풀의 공간 매니저로 일했던 신익균은 낡고 오래된 갤러리를 매만지며 얻은 아이디어들을 작업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에서부터 형태와 재료를 확장해 가면서 전시 디자인을 한다. 지붕에 빗물이 새고, 여기저기 물이 고이고, 마당에서 누군가 나무 태우는 것을 보면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고, 마당의 자갈과 남은 재료들로 이런저런 형태를 만든 과정에 대해 신익균은 정확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다음에 풀의 공간을 관리할 사람에게 남긴 ‘풀 소사'의 안내서는 업무 일지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섞여 있는 작가의 드로잉이기도 하다. 신익균도 정서영처럼 형태가 그 자체로 관성을 교란하고 그 교란이 읽히길 바라며 설치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스무 해의 기억은 또 다시 읽고, 다른 색을 입히고, 재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생각하기 싫은 것, 부족했던 것, 질긴 습관으로 남아있던 것을 더 읽어야 한다. 살 힘이 있고 그럴 가치가 있을 때 병력을 더 꼼꼼히 다시 읽는다. 그래서 아카이브는 자기 파괴적이면서 살아있다는 기록이 된다. 아직 풀에 읽을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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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풀 프로덕션 《김대환 개인전: 안녕 휴먼?》
 
○ 전시명: 안녕 휴먼?
○ 작가: 김대환
○ 기획: 김선옥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및 설치: 신익균, 염철호, 정덕현, 최조훈
○ 관람기간: 2019년 6월 13일(목) ~ 7월 14일(일)
○ 오프닝: 2019년 6월 13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후원: 서울문화재단
 
 
 
 
 
 
 
 

펼쳐서(展) 보여주기(示), 그리고 우회하기
 
김선옥 (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이 글은 통상적인 ‘서문’(preface)이다. 전시를 보기 전에 읽었으면 하는, 문자 그대로 ‘서문’. 전시 서문이 왜 굳이 자기 소개로 시작하는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이 글은 전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안내문도, 전시를 해석하는 비평문도, 혹은 이미 전시를 본 후에 작성한 리뷰도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가이드 정도이거나 당신의 동선과 동작을 예측하는 어설픈 가정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전시장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이 글로 미리 당부하고 싶은 것은 김대환이 보여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역설과 반어로 가득한 그의 세계는 절대적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곳의 모든 표상은 거의 ‘속임수’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다음과 같다. “부디 의심하시오.”
 
김대환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환유에 가깝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계속해서 다른 식으로 확장되고 연결되면서 여기에서 발생하는 의미가 단 하나로만 규정되지 않도록 작가는 간접적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따라서, 작가가 안내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가 때로는 다소 느릴 수도 있다. 다만, 만약에 그가 정한 선로를 당신이 이탈하지 않는다면, 그 길의 목적지를 명확하게 알아내려 하는 것보다 오히려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에 중간 지점에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힌트들을 찾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따라서, 이 여정은 수수께끼의 정확한 해답을 한 번에 찾는 것보다는 스무고개의 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에 가깝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기
1. 전시장에는 사물들이 부유한다. 이곳에서는 견고하지 않은 의미들이 생산되고, 그것들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이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당신은 어쩌면 막연하게 불안할 것이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커지면서 동시에 작아진다.’ 당신도 김대환의 작품에서 그런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느 옛날 철학자가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의를 가지라”고.
 
1-1. 풀의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창문이 낯설다. 여러 사물을 합성해 놓은 듯한 푸른빛의 거대한 이미지가 마치 출렁대며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2D 평면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풍경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조악해 보이는 저해상도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떠다니는 사물들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중첩된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만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여기에 숨겨진 대상들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하나씩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나 옵아트(Op Art)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힌트 하나를 주자면, 이 이미지를 전시장을 나오기 전까지 꼭 기억하길 바란다.
 
창문 가운데 작은 프레임이 있고, 그 중심에 카메라가 켜진 스마트폰 하나가 있다. 당신은 우선 맨눈으로 프레임 너머 무엇이 있는지 열심히 관찰할 것이고, 호기심/의심 가득한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살펴보며 그 너머를 향해 두 번째 응시를 시도할 것이다. 당신의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는 (운이 좋다면) 휴먼 스케일의 대상이 존재할 것이고, 움직이는 대상은 동일한데 ‘이상하게도’ 위치에 따라 스케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곧이어, 당신은 6인치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응시의 자리가 권력의 자리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도. 혼란스럽다. 그러게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는가? “부디 의심하시오.”
 
1-2. 이제 앨리스처럼 토끼 굴로 들어갈 차례이다. 당신은 전시 제목 《안녕 휴먼?》과 더불어 전시장 앞에서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서, 이번 전시가 ‘인공 지능’(AI) 혹은 ‘환영’(illusion)에 대한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수평과 수직이 거의 맞지 않는 풀의 바닥과 벽을 ‘이상한’ 사각형의 구조물이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고 있다. 관객참여형 전시라고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다. 이미 무슨 전시인지 다 보기도 전에 ‘알 것 같아서’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어쨌든 구기동의 변두리까지 힘들게 찾아왔으니 우선 들어가 본다. 천장의 높이와 바닥의 경사가 모두 다른, 온통 새하얀 벽면의 내부가 ‘이상하다’. 공간에 맞춰 온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방 안쪽을 향해 가는 당신이 애처롭다. 그러나, 기존의 전시장 바닥과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바닥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목은 아파 오고 몸을 잔뜩 웅크린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서 여기를 얼른 탈출하고 싶어졌지만, 불현듯 당신을 보고 있을 저 창 너머의 누군가의 시선이 생각난다. 그런데, 몇 분만에 응시의 대상이 바뀌었다. 조금 전 전시장 밖에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 당신이 보는 세계가 시각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여기 내부로 들어온 순간 당신 자신이 보이는 대상으로 관계가 전복되면서 조금 전까지 당신이 봤던 세계, 그 유령 같은 풍경의 존재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다)
*혹시 당신이 호기심/의심이 많은 관람객이라면, 이 구조물을 나가자마자 외부를 빙 둘러볼 것이다. 전시란, 몸을 움직여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이상한 나라에 갔던 앨리스는 6개월 후 거울 반대편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는 어디든 가기 위해서는 본인이 가려는 방향과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당신은 이제 이 구조물을 나가기 전 잠시 머뭇거릴 것이다. 작은 삼각형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반짝거리는 거울과 타일 바닥이 화장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은밀한 공간에 놓여 있는 ‘이상한’ 사물이 하나 눈에 띈다. ‘휴먼’ 스케일(scale)에 어긋나는 크기의 조형물은 실체를 알 듯 모를 듯 보이지만, 당신이 추측하는 그 생명체가 맞다. 그리고, 거울에 반사된 당신의 ‘이상한’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까 봐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꾸깃꾸깃하게 구긴,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 ‘스케일’이 달라진 당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인식 과정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몸이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모험과 유사하다.[1]실제 스케일이 달라진 채로 거울에 반사된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다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거울 속 대상은 단지 반사된 형상이 아니며,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가치가 달라질 수 없는 존재다. 표상의 세계에서 거울 밖의 당신과 거울 속 당신은 그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앨리스는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당신도 이제 꿈에서 깨고 현실로 돌아올 순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하게도’ 당대에는 전혀 이상할 것 없었던 현실(부조리했던 18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영국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은 거대한 ‘체험관’을 나오며, 또 다른 착시효과를 예상하면서 바로 옆 방의 나무 바닥에 발을 들일 것이다. 그리고, 당황할 것이다.평면과 입체가 뒤섞인, 오히려 전시의 전통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는 전시장에서 당신은 오히려 어디를 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눈과 발의 방향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방의 입구부터 ‘이상하게’ 배치된 작품들을 시작으로, 도대체 작품을 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동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으며 작품들은 마치 기능을 멈춘 채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김대환의 이전 작업을 본 적이 있다면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할 것이다) 조각의 덩어리는 해체되어 이제는 좌대 위에 놓인 채로 기능하지 않고, 질료들은 속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형상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공간은 어떤 규칙이나 질서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만약 당신이 성실한 관람객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고 현대미술에 대한 넓은 아량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작품들의 표면을 살펴보면서 각 매체가 드러내는 특징을 빠르게 간파하려 하겠지만, 이러한 독해 방식으로는 안타깝지만 ‘오해’만 늘어날 뿐이다.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길 바란다. 가령, 그림이 향하고 있는 시선의 위치라던지, 작품이 이 공간에 새롭게 개입함으로써 달라진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특정 위치와 특정 시각에서만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획득할 수 있도록 김대환이 구축한 상황은 전시에서 작품을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눈과 발을 가로막는 작가의 일시적인 ‘교란 작전’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마침내 다다르는 그곳에 살짝 걸터앉아 보이는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한’ 풍경은 결국 다르게 보일 것이다. 6월과 7월의 여름은 볕이 좋은 계절이다.
 
1-1-1. 바닥이 조금 낮은 곳을 열린 문을 통해 기웃거린다. 안에도 작품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막상 전시도 거의 다 본 마당에 대충 보고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낮은 공간으로 내려가기에는 망설여져서 문턱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는데 공간에 들어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무엇인가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것 같다. 귀찮지만 결국 몸을 움직여 삐걱대는 계단을 내려간다. 작품인지도 모를 트렁크 위에 ‘이상한’ 드로잉이 하나 걸려 있다. 초상화인가 싶은 것이 가족을 그린 것 같은데 배경이 하늘이다. 혹시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을 보면서 연상되는 모양을 상상한 경험이 있는가?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 창문에서 봤던 ‘이상한’ 그림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가 생산되는 과정은 인식의 행위를 통해서 완성된다.
 
이상하지 않은’ 나라로 돌아오기
0. 김대환은 어느 날 내게 짧은 유튜브(Youtube)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닥에 있는 옵아트(Op Art) 그림을 보고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림 속 기하학 패턴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인식한 것일까? 영상 속 고양이는 패턴과 싸우듯 종이를 물고, 뜯고, 씹어 먹기까지 하였다. 그림의 움직임은 결국 고양이의 반응이 발생하도록 한 셈이며, 이것은 착시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양이는 새로운 대상을 봤고, 이것을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결국에는 움직임을 수행했다. 이미지를 인식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에 대한 반응도 작동하기 시작한다.
 
《안녕 휴먼?》은 오늘날 미술이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 맞춰 수동적이 된 상황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제 전시는 작품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고 무결하게 ‘보이기’만을 위한 스펙터클 쇼가 되었다. 그리고, 전시 관람은 전시를 보고 인식하는 행위가 아닌, 봐야 하는 의무감을 동기로 움직이는 의례적인 행사가 되었다. 김대환은 이러한 전시에 대한 고질적이고 상투적인 몸짓을 거부한다. 이것은 장소에 의해 재규정되는 작품을 전시 구조 안에서 새롭게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시각적 생산물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전시에서 우리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전시를 통해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미술의 언어로 환원되는 모든 이미지를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작가의 ‘손’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장소로 작동하는 것, 그것이 ‘전시’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펼쳐(展)’ ‘보여주는(示)’ 존재로 남아야 할 이유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휴먼 스케일을 초월한 본질적인 것을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세상은 지금 그대로일 것이며, 어떤 행위 하나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향수에 잠겨 다른 우주를 몽상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양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보다, 아예 그 외양을 부숴 버리는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좀더 정확히 말해 인간 정신의-전혀 다른 모험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우리 내부의 어떤 비밀스러운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벗어 던지는 일에 몰두하게 될, 그런 우주를 몽상하는 것이다.[2]
김대환은 전시가 일종의 “진짜 맛집”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령, 인정된 가치를 찾기 위한 체험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경험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치가 존재하는 곳 말이다. 김대환이 찾고 있는 환상의 세계는 그런 “전시 맛집”이 아닐까? 그곳은 작가의 진짜 ‘손맛’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한 최적의 장소일 것이고, 작가와 관람객 모두 서로의 시공간을 기꺼이 공유할 가치가 있는 사려 깊은 초대의 자리로 존재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끝에는 작가의 편지가 한 통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이 전시장을 떠날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내가 지금까지 끄적거린 글과 다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어쩌면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에 내가 찾은 답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이것은 동시에 한 작가의 ‘개인전’에 임하는 기획자(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세계에 과연 완벽하게 다다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 차이의 두려움을 핑계로 머뭇거리지는 않기로 했다. 그 다름이 혹여나 그의 세계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이번 전시의 불완전한 조각을 어쩌면 그 차이로 인해 완성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디 당신도 망설이지 말고 직접 바닥에 발을 디디고 눈으로 발견하길 바란다. 당신이 몰랐던, 혹은 이미 알고 있던 그곳을.


[1]심리학에서 자신의 몸이나 물체가 실제보다 크거나 작게 왜곡되어 보이는 증상을 ‘앨리스 증후군’이라 한다.
[2]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윤정임 역, 열화당, 2007,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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