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CURRENT

 
○ 전시명: 기체 액체 고체
○ 작가: 여다함
○ 기획: 안소현
○ 퍼포머: 공영선
○ 음악: 날씨
○ 영상 촬영/편집: 최윤석
○ 사진: 박해욱
○ 공간디자인: 양재형
○ 설치 도움: 김형준
○ 그래픽디자인: 들토끼들
○ 도움 주신 분들: 권병준, 여혜진, 최경주
○ 기간: 2019년 9월 17일(화) ~ 10월 20일(일)
○ 오프닝: 2019년 9월 17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빈 자리의 도시 산책 연습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여다함이 만든 것 앞에서는 종종 말이 빈다. 그것이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자명해서 숨은 의미를 캐내거나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물질의 자명함은 때로 말을 부대끼게 한다. 개념을 향한 의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전시 제목도 큰 말을 붙이려는 충동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추상적인 말로 문을 열려 하는 습관을 버리는 편이 낫다. 말로 다가가는 습관은 생각보다 질겨서 버리려면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데, 이 글도 그런 연습의 하나였으면 한다. 물론 말 대신 감각을 채워넣는 과정을 도리 없이 말로 풀어야 하는 이 상황이 얄궂기는 하다.
 
이 전시에는 프롤로그가 있다. 전시장 가장 큰 벽에 검은 바탕 위에 흰 선이 구불구불 지나가는 이미지가 걸려 있는데 제목은 <발밑>(2019)이다. 다가가 보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가르마를 탄 정수리를 확대한 사진들이다. 신체를 확대해서 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묘할 수 밖에 없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머리 꼭대기에 붙은 ‘발밑'이라는 제목이다. 몸을 모로 뉘여 정수리를 밟고 선다고 상상해보자. 머리의 주인은 자신의 정수리 능선을 따라 난 가르마 오솔길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전시를 함으로써 머리의 주인도, 우리도 그 길을 보게 된다. 여다함은 그렇게 보지 못했던 길을 보고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한다. 
 
이제 뜨개질에서부터 연습을 시작해보자. 익숙한 방식대로라면 눈은 맨먼저 뜨개질의 결과물이 무엇을 닮았는지 찾을 것이다. 그 닮음이 정해진 상징으로 안내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산맥을 닮았으면서 곰팡이가 생각나게 하고(<무제>), 다른 것은 종유석 같기도 하지만 매달린 죽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60촉 바디 랭귀지>). 또 다른 것은 <향로>라는 정직한 이름을 갖고 있고 연기도 내뿜지만 어쩐지 자꾸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여다함에게서 닮음은 효과적인 출발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반면 뜨개질을 하는 동작과 과정은 이름을 붙이기는 쉽지 않지만 일관되다. 아무리 크고 넓은 면도 모두 하나의 코에서 시작하지만 코는 실을 당기기만 해도 사라져버린다. 모든 코는 실의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며 아무도 완벽하게 같은 두 개의 코를 만들 수 없다. 실과 뜨는 방법이 같아도 결과가 같지 않다. 내가 시작한 것을 멈추지 않고도 다른 사람이 시작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뜨개질은 동일성의 허무한 상실 또는 느슨한 동일성의 미덕을 갖고 있다. 게다가 뜨개질을 잘 하려면 말의 명령보다는 신경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런 사실은 여럿이 대화를 나누며 뜨개질을 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여다함은 누군가 “뜨개질은 원래 혼자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한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고 했는데, 같이 할 때야말로 뜨개질은 의식적 궤도에서 벗어나 무의식적 신경의 궤도로 진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뜨개실이 피어나고 자라나서 사라지는 과정에 주목하는 연습을 한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고드름, 종유석, 향로 등을 닮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고드름과 종유석은 액체와 고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자라고 제 몸이 아니었던 것과 만나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한다(여기서 우리는 자기계발서 식의 교훈에 빠지지 않는 연습도 해야 한다). 우리는 처마밑과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생성을 드물거나 신비롭다고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고정된 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흐르는 것을 흐르는 채로, 변하는 것을 변하는 채로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말의 구속은 참으로 거추장스러운데, 느슨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말이 사유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뜨개실이 향로로 자라나는 것과 그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굳이 구분해서 말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생성이다.
 
다음으로 연습할 것은 부서짐의 감각이다. 여다함은 신경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잠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온전한 언어를 얻기 힘든 것이다. 잠의 경험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을 깨는 순간 순식간에 부서져 버린다. 간혹 몇 마디를 남기지만 그 말들조차 규범의 언어에 의해 소통의 밖으로 밀려나 부서져 버린다. 그래서 작가에게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 경험을 그나마 가장 가까이서 밖으로 기록하는 것은 이불이다. 이불은 자는 동안의 몸의 움직임을 들썩거림, 뒤척거림, 몸부림의 물결로 만든다. 하지만 그 물결도 계속 부서지며 자고 일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는 매한가지다. 이불이 “내일 부서질 무덤'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여다함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호기롭게 시각화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라짐을 관찰한다. 그가 말하는 무의식은 라깡이 말하듯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는 커녕, 언어에 다다르지 못할 만큼 조금씩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여다함이 말하는 죽음에는 어떠한 비장감도 없다. 잠이 죽음과 엮여서 거창해진다기보다는 죽음이 잠이라는 체험 학습을 통해 친근해진다. 그래서 전시된 <내일 부서지는 무덤>(2019)의 이불은 보드랍고 폭신하고 홑청의 파도 무늬는 당장 끌어안고 싶게 다정하다. 동명의 공연에서는 퍼포머가 장소를 가득 메운 커다랗고 포근한 누비 이불을 관객들과 나눠덮는다. 잠은 그래서 날마다 한 코씩 떴다 풀어버리는 죽음이다. 우리는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할 때처럼 우리가 언어화 할 수 없는 죽음의 시간들을 조금씩 떠본다. 그러다보면 어느날 목에 턱하니 죽음이 둘러질 것이다.
 
또 다른 연습은 ‘구멍'에 관한 것이다. 퍼포먼스 <내일 부서지는 무덤>과 영상 <경>(2019)에는 사각의 거울을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가 나온다. 거울은 퍼포머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머가 있는 주변 환경을 담거나 팔과 다리 등 신체의 일부분만을 복제한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있을 때보다 좀 더 사라져 보인다. 그는 단단한 껍질을 가진 온전한 신체가 아니라 완전히 규정되지 않은 채로 일단 거기 있는 신체, 때로는 ‘하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부분'이나 ‘여러 부분들'처럼 느껴지는 괴물이다. 따라서 여다함의 거울은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을 마주보며 ‘나는 저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인하는 자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세상의 구멍이 되는, 굳이 이름하자면 내 안의 ‘비’자아를 위한 공간이다. 거울-구멍은 그렇게 세상을 다층으로 만들어 다른 깊이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그 느리고 뒤뚱거리는 움직임이 묘하게 애틋한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지탱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뜨개실도, 이불도, 거울도 여전히 익숙하고 평범하다. 여다함은 그 사물들이 대단한 진리의 담지자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람들이 이름만 붙여놓고 만족한, 너무 쉽게 알고 있다고 단정한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다함이 만들어놓은 것에서 그렇게 동일성을 허무하게 상실한 것, 순식간에 부서져버리는 것, 사라지고 부분으로만 지탱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법을 연습하다보면, 우리는 번잡한 도시에 적합하게 산책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명상처럼 완벽히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자연 같은 것은 굳이 필요 없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과테말라 5000>(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차와 사람이 넘쳐나는 도시에 적합한 산책이란 도시의 효용과 관계 없는 움직임들을 장려하는 것이다. 이 공연은 2015년부터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이나 <별똥별 체조>에서 보여주었던 ‘얼음 풍선’(헬륨 가스 풍선에 얼음을 매단 것으로 작가는 ‘갈등을 구조화한 장치’라고 부른다)에 청각적 요소를 더한 것이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당기는 얼음과 풍선에 사운드 센서를 더해 그들 사이의 긴장이 움직임과 소리로 드러나게 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부유하는 얼음 풍선은 도시의 피부를 매만지는 물결이 된다. 지난 해 ‘보안여관'에서 한 퍼포먼스 <객지 여덟 밤>에서는 관객들을 통의동 일대를 걷는 밤산책에 초대해서 그림자로 쓴 꿈 속 이야기를 전해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불을 덮고 누워 여러가지 소리를 듣고 소리의 진동을 느끼게 하였다. 낯선 잠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듣는 낯선 소리로 인해 관객들은 도시에서 남의 꿈을 훔쳐 들은 것 같은 두근거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벽면을 뒤덮은 전단지의 숲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은 흔적 이미지들은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처럼 시선을 쉬어가게 만든다(<벌목꾼-어흥>(2019)). 여다함의 미덕은 마디를 만들다 놓친 것들, 이름을 붙이다 잊은 것들을 요란한 초월 동작 없이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 앞에서 연습을 반복할 수록 우리는 여기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각질로 가득한 도시를 찬찬히 다시 더듬는 감각을 익히게 된다. 늘 보던 것들로 지금 이곳을 달리 보게 하는 것, 예술이 말에 짓눌려 종종 잊은 그것, 도시 산책자가 비로소 깨워 준 대단하지 않은 그것이다.

FORTH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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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

2019 풀 프로덕션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 전시명: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 작가: 김지평, 남궁호석, 신익균, 엄지은, 정서영, 주황
○ 기획: 안소현
○ 기획보조: 김선옥, 신지이, 한상은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프로그램 개발: 홍진훤
○ 공간디자인: 신익균
○ 공간디자인 보조: 안부, 정덕현, 조재홍
○ 관람기간: 2019년 8월 1일(목) ~ 9월 1일(일)
○ 오프닝: 2019년 8월 1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20년, 특별할 만한 시간이다. 십진법이 선사한 소소한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별한 시간을 기리는 익숙한 방법들이 있다. 기억을 되살리고, 의미를 되새기고, 사람들을 모으고, 널리 알리고,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참에 그런 등거리적 특별함 말고 변곡의 특이점을 만들 수는 없을까. 늘 끌어안고 살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알게 된 집안 비밀처럼, 시끄럽지만 치르면 그만인 기념 말고 조용하지만 두고두고 뒤흔들 기억을.   

미술에서는 기억을 모아놓은 것을 흔히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참 헐거운 유행어였다. 무엇을, 어떻게 구조화해서,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보는 이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거나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카이브 병(mal d’archive)’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이 기억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리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카이브를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기관의 긴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누군가의 철저한 수집벽을 드러내기 위해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이런 파괴의 뉘앙스 소실은 어느 정도는 프랑스어 mal(병/악)을 영어의 fever(열병/열풍)으로,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난 의미의 쏠림 때문인 것 같다)   

죽음 충동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카이브는 늘 다시 읽고 새로 쓰기를 요구한다.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저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재구성을 전제로 하며, 언제나 동일성을 포기하면서 새로이 구축된다. 아카이브는 그렇게 ‘아나카이브(anarchive)’가 된다. 병력(anamnesis)을 살피듯 과거를 꼼꼼히 다시 읽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병을 치료하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간에. 풀에도 아카이브를 재가공하는 프로젝트가 여럿 있었다. 인쇄물, 사운드, 만화, 미술비평, 사회적 미술 등 때로는 매체로, 때로는 주제로 아카이브를 재구성해왔다. 

2019년의 풀은 어떤 ‘아나카이브’를 구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20년을 신화화하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피게 하는 병력을 기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동일성을 무너뜨려 공간이 사라질 각오를 할 만큼 미래를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먼저 너무 요란하지 않은 가볍고 자연스러운 아카이빙의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요즘 자료를 모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역시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좀 더 정교한 발췌를 원할 때는 확대 하거나 크롭 하고, 그 이미지/텍스트에 또 다른 글을 붙여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는 점점 더 흐려졌다. 전시 리플렛에 실린 글부터 인터뷰, 책, 작품, 사진, 메모, 영상 등이 아무런 위계도, 계통도 없이 모여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의 20년을 크롭 하다보니 점점 도드라진 곳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을 분류하는 유일한 기준은 ‘생각’ 뿐이었다. 그 생각을 드러내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물을 때마다 매끈한 답을 얻지 못했다. 누군가는 종이 위의 선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밑그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습작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생각의 메모라고 했다. 결국 형식도 매체도 정해져 있지 않지만, 목적지에 대한 강박이 없는 모든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냥  만들어가다 보면 어떤 꼴이 나오고, 그 꼴이 마음에 들면 이름을 붙여 불러주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쪽에 남겨두는 그런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런 애매함이 꼭 풀 같았다. 20년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풀을 그려왔다. 그것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드로잉 룸’은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드러난 일반적 공간에서 감춰진 특화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응접실 같은 곳을 가리켰다고 한다. 풀의 20년을 다시 읽으면서 특화하고 싶은 몇 개의 이야기들을 아카이브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풀이 앞으로 더 깊숙이, 신중하게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주제를 제시해보려 했다. 여섯 작가가 그 주제들을 통일성 없는 연쇄성으로 이야기한다.     

누군가 정서영은 풀에 잘 안 어울린다고 하면 주저 없이 수긍하겠지만, 풀의 미래를 고민할 때는 항상 정서영이 떠올랐다. 정치적 내용을 어떤 미적 형식에 담을 것이냐는 당의정 같은 질문 말고, 어떻게 미술이 관성, 트렌드, 권위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냐는 소금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서영이 풀의 개관전 초청 작가였다는 것은 의외지만 마땅했다. <쇼케이스 쇼케이스>(2015)는 전시의 프레임이 만든 관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역시 물살의 세기는 떠내려갈 때는 잘 모르고, 거스를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 

풀의 크고 작은 전시와 일에 참여해온 김지평도 너무 익숙해서 간과했던 전시의 프레임을 비로소 보고 읽게 만들어서 보는 것을 교란한다. 우리의 굳은 머릿속 전시는 식민지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어서인지, 전통적인 ‘보여주기' 장치들은 좀처럼 섬세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김지평은 프레임 속 이미지를 단순화하거나 비워버림으로써 족자나 병풍 자체를 주인공으로 모신다(<모심>). 작가는 족자의 각 부분을 여성의 옷 명칭으로 부른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랫부분은 치마, 윗부분은 저고리, 양 쪽에 달린 띠는 소매라고 불린다. 그리고 각 족자에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붙여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레베카는 망령으로 떠도는 다중인격의 미녀이고, 검은 벨벳을 두른 카르밀라는 뱀파이어 소녀이며, 금발과 진홍색 드레스의 오들리는 이중혼을 감행하는 선정소설의 주인공이다. 세 족자는 규범을 우습게 아는 매혹적인 여자들의 초상화이다. 민족주의적 전통은 문을 닫아걸지만, 여성주의적 전통은 못 보던 세계를 향해 문을 연다.  

2009년 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주황도 줄곧 여성들의 초상을 찍어왔다. 영상 <민요, 저곳에서 이곳에서>(2018-)에서는 프레임 안에 꽉 찬 여성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약간 다른 발음, 생경한 가사, 그러나 어딘지 익숙한 멜로디의 민요를 부른다. 민요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사도, 리듬도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민요가 때로는 사랑 노래로, 때로는 혁명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에 사는 소위 ‘동포’들이 부르는 민요는 이주의 역사, 이데올로기, 정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요약 불가능한 정서들을 함축한 일종의 시적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스펙터클한 화면, 드라마틱한 사연,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더할 나위 없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증언이 된다. 

풀랩(풀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엄지은의 <줍는 배: 고리 밖에서>(2019)도 작가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믿으라고 외치지 않는데 ‘아’ 하며 빠져 들어가는 이상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상은 육지가 바다에 잠겨버린 미래에, 역사의 흔적을 ‘줍는 배'가 길어 올린 것들이 마구 다가와 부딪히는 것을 기록한 처음 보는 종류의 항해일지이다. 배가 주워올린 흔적들 사이에는 인과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그야말로 초시간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사건들 사이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유사성을 읽어내는 엄지은의 시선을 밑도 끝도 없이 따라가게 된다. 더듬어보면 사실 다큐멘터리는 이미 그래왔다. 그 시제가 과거라는 이유로,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말과 이미지들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엄지은은 인과성도, 시간적 순서도, 상식적인 것도 없애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엮어낼 수밖에 없으며, 낯선 유사성은 현실을 더 날카롭게 노려보게 해준다. 

시간을 자유롭게 부리면서 예측 못 할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은 남궁호석이 즐겨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2000년과 2004년 풀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2006년 <미래일보>를 발행한 이후, 2007년부터 문신을 둘러싼 위반과 제도화의 흥미진진한 줄다리기에 매료되어 현재 타투이스트이자 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남성적이고 과격한 이미지로 굳어진 문신을 새기는 동작이 전통적 여성의 이미지로 고착된 수를 놓는 동작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천에 사진을 프린트하고 그 위에 수를 놓았다. 1980년대 남성들이 열광했던 권투 선수들의 근육질 몸에 참하고 섬세하게 자수를 놓음으로써, 작가는 젠더적, 사회적 선입견들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궁호석은 타투이스트로서의 일과 작가로서의 작업이 자신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신익균의 설치작업과 전시공간 디자인을 관통하는 생각과도 이어진다. 풀의 공간 매니저로 일했던 신익균은 낡고 오래된 갤러리를 매만지며 얻은 아이디어들을 작업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에서부터 형태와 재료를 확장해 가면서 전시 디자인을 한다. 지붕에 빗물이 새고, 여기저기 물이 고이고, 마당에서 누군가 나무 태우는 것을 보면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고, 마당의 자갈과 남은 재료들로 이런저런 형태를 만든 과정에 대해 신익균은 정확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다음에 풀의 공간을 관리할 사람에게 남긴 ‘풀 소사'의 안내서는 업무 일지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섞여 있는 작가의 드로잉이기도 하다. 신익균도 정서영처럼 형태가 그 자체로 관성을 교란하고 그 교란이 읽히길 바라며 설치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스무 해의 기억은 또 다시 읽고, 다른 색을 입히고, 재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생각하기 싫은 것, 부족했던 것, 질긴 습관으로 남아있던 것을 더 읽어야 한다. 살 힘이 있고 그럴 가치가 있을 때 병력을 더 꼼꼼히 다시 읽는다. 그래서 아카이브는 자기 파괴적이면서 살아있다는 기록이 된다. 아직 풀에 읽을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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