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개

 

아트 스페이스 풀은 2014년 첫 번째 풀 프로덕션으로 차미혜, 한진의 전시 《회색의 바깥: 차미혜, 한진》(4월 11일~5월 31일)를 선보인다. 두 명의 작가는 사적인 고통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와의 관계를 특유의 감수성으로 예민하게 포착해낸다. 신작을 포함한 회화, 드로잉(한진)과 사진, 영상(차미혜) 작업은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틈을 형태적 표현으로 확장한다. 이들의 화면 속 인물과 풍경은 공통적으로 어딘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공간에 놓여 있다. 구체적인 맥락과 상황이 부재한, 이 ‘무중력 상태’의 이미지에 남아있는 방황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풍경이 노래하는 순간

한진의 작업적 태도를 압축하는 한 문장이 있다면 그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다.”일 것이다. 응시한 대상의 풍경과 그 움직임 속에 나름의 ‘후광’, 다시 말해 존재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화폭 위에 드러내는 행위야말로 그녀가 작업을 통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가까운 이의 투병 생활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생사의 동시성에서 인간의 필연적인 비극과 그 이면의 찰나적인 아름다움을 목도하였다. 말라붙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대상, 그 경계에 위태롭게 놓인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희망을 성급히 말하진 않지만, 때문에 그토록 희망적이다.

“풀이 완전히 눕기 전, 생명이 모두 잠들기 전 바라본 풍경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함은 어쩌면 내가 감각하는 현실들이 ‘인생의 가장 처절한 상황이 오히려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 작가 노트 중에서

작가는 불씨가 사라지는 순간의 캠프 파이어 앞에서 불안하고 초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했다. 작가가 당시에 느꼈던 소멸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은 이제 그 풍경의 소리를 듣는 능동적인 몸짓으로 변화되었다. 그림 앞에서 손목을 끈기 있게 움직이면서 ‘부재의 순간’을 채우는 적극적인 행위에는 음악적인 운율이 느껴진다. 불안과 초조라는 신경증이 화면 안에 내적인 질서를 부여하면서 하나의 음표를 만드는 과정은, 작가 자신이 말한 대로 “그려지는 대상에 대한 독주(獨奏)”와 같다. 그리고 이것은 화면 앞에서 자기 앞의 질문을 마주한 젊은 화가의 솔직한 고백과도 같다.

 

무(無)를 향한 애도

 

차미혜는 소멸 직전에 놓인 사물과 풍경에 내재한 가능성에 주목한다. 첫 개인전에서 자신이 겪어온 이명(耳鳴) 증상에서 비롯된 탐구를 통해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른 세계(소리)로의 통로를 모색했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들의 파편을 조합하여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 사이의 ‘식별 불가능성’을 이미지화한 작품을 선보인다. 어떤 기준이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작가의 관심으로 인해, 이미지는 가시적인 재현과 비가시적 환상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왕복하면서 화면 안에서 몽타주를 형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무인칭을 위한 노래>(2013)는 두 개의 분할된 화면에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병렬로 배치되는 영상 에세이이다. 영상 속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저수지에 빠져 죽은 개의 유령(화자)’의 시선은 화면에서 점차 ‘다 인칭’으로 확장하는데,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를 통해 화면 속의 ‘나’라는 주체가 점차 지워지고 타인과 겹쳐져 결국 ‘모두가 가능한 상태’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인칭의 교란’을 통해서 호명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미세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어’의 해체를 더욱 구체화하는데, 작가의 짧은 에세이를 낭독하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전시공간 안에 섞이는 사운드 설치가 그 예다. 또한, 16mm 필름 작업인 <얼굴 없는 얼굴>(2014)은 작가가 꿈에서 만난 인물과 나눈 짧은 대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단편 영상물로, 개체 간의 관계와 역할에 질문을 던진다.

차미혜의 작품제목 속에 반복되는 주소 “없는” 집, “무”인칭, 얼굴 “없는” 얼굴과 같이 실재를 부정하는 어법에서, 자신을 세계의 ‘바깥에’ 놓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명확해 보이는 기준을 허물면서, 작품 안에 “비정형 상태의 목소리”을 불러내고, 세상에 무수한 ‘이름없는 것들’을 애도한다. 자연적인 빛의 이동, 공기 중의 미세한 움직임, 그리고 당시의 감정을 포착하는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이미지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관객 각자의 기억 속에 무한을 담는다.

회색의 바깥

차미혜, 한진의 작업은 바깥에 있기도 하고 또 안에 있기도 한, 마치 그늘과 같은 ‘어슴푸레한’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가능한 사유로써, 그 식별 불가능성을 ‘이미지’로 가시화시키고, 이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두 작가의 공통점일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어둠과 빛을 분리하지 않는 회색-어둠을, ‘어슴푸레함’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실존의 토대인 빈 장소이자, 존재의 장소로써 회색은, 구분이나 분리가 되지 않는 딱히 정의 내리기 힘든 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개념적으로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회색’의 구별 불가능성이, 곧 구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능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이는 역설적으로 존재의 위치를 정할 수 있고, 그것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회색의 ‘바깥’이라고 명명한, 이 선언적인 단어는 이번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전시 오프닝 당일, 전시장 안팎에서는 관객과 배우의 역할을 해체시키고, 꿈 속의 이미지를 조합하는 퍼포먼스 <꿈의 입장>(차미혜)이 진행되며, 전시장 외부에서는 낡은 창고 벽면에 남겨진 흔적을 토대로 하는 벽화 작업(한진)이 전시기간 동안 진행된다. 전시장 안팎을 허무는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업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는 특정 사물이나 현상으로부터 외부,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로 확장해가는 향후 작업 방향을 보여주며 관객들로 하여금 개별적인 맥락에서 정서적인 여운을 줄 것이다. 

   

조은비(아트 스페이스 풀 기획실장)

 

* 본 전시명은 차미혜 작가의 작품 <주소 없는 집>(2013)의 작가 노트에서 따왔다.    

* 참고 문헌: 알랭 바디우, 서용순, 이수현 역, <베케트에 대하여>, 민음사, 2013

 

 

작가소개

 

한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하고, 'Drawn to Drawing'(갤러리175, NAKAI 교토, KAZE 오사카, 2013), <환상적 현실>(비 투 프로젝트 갤러리, 2011), <그 자리를 벗어나서>(이브 갤러리, 2011) 등의 단체전에 참여해왔다. 2011년 DM아트센터 DM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dim. Garden'을 열었다. 한진은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과 망각의 과정을 재료의 응집과 소거의 반복적인 축적을 통해 표현한다. 사실적이기 보다는 ‘보았을 때의 순간’, ‘움직이는 결’을 따라간다. 이러한 과정은 그리는 대상에 대한 독주(獨奏)와 같다. 잊혀져 가는, 스쳐져 가는 풍경들이 다시 주체가 되어 노래하는 순간을 담아낸다. 

 

차미혜는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첫 개인전 <울림, 지나칠 수 없는 Echo, inescapable>(코너아트스페이스, 2013)과 'Analog Welcome, Digital Archive'(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2013), <점점점 Connecting the dots>(동덕아트갤러리, 2013)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워싱턴 프리어 갤러리 한국영화 페스티벌, 마드리드 컨템퍼러리 오디오-비주얼 아트 페스티벌 MADATAC 등에서 영상 작품이 상영되었고, 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아비드 어워드 상을 수상하였다. 차미혜는 각 개체들이 비정형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견고한 상태나 사고를 의심하며, 어떤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잠재된 가능성을 영상과 사진 등을 통해 표현한다.